『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시집/창비
알게 된 지 얼마안 된 시인 정호승 님. 시의 매력이라면, 언뜻 이해되는 것 같으면서도 곱씹어야 설명이 되거나, 혹은 읽자마자 감탄하며 공감이 곧바로 되기도 한다. 한편, 읽는 이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평소 좋아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소개된 시 한 편에 매료되어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읽게 되었다. 그중 비슷한 맥락의 시 두 편을 소개하며 반절도 이해 못 했겠지만, 이해한 만큼, 공감한 만큼의 지금의 감정을 기록해 본다.
축하합니다
이 봄날에 꽃으로 피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이 겨울날에 눈으로 내리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괜찮아요, 손 드세요, 손 들어보세요
아, 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신 분 손 드셨군요
바위에 씨 뿌리다가 지치신 분 손 드셨군요
첫눈을 기다리다가 서서 죽으신 분도 손 드셨군요
네, 네, 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실패를 축하합니다
천국이 없어 예수가 울고 있는 오늘밤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희망 없이 열심히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상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의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하는듯 하다. 마태복음 19:24, 마가복음 10:25, 누가복음 18:25 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성경 새 번역 표현으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가난하고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 오늘, 주어진 현실은 희망이 없이 힘겹지만, 천국에 들어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이 있더라도 현실은 아프고 힘들다. 그러니 "희망 없이 열심히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라는 표현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칼날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감상
칼날 위를 걸어야하는 현실이 희망이 없어 보이고 고통스럽지만, 그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야 하니 나도 칼날이 되어 더더욱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칼날이니 나도 칼날이 되었던, 그래서 누군가를 또 아프게 했을, 내 걸어온 길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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